/이솝우화/속의 이야기다. 모기가 사자에게 말했다. “난 당신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나보다 나을 게 없어요. 나은 게 있다면 말해보세요. 아마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겠지요. 남편과 다투는 아내라면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답니다. 내가 당신보다 훨씬 세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 내킨다면 한번 겨뤄 보는 게 어떻겠어요.말을 마치 무섭게 모기는 나팔을 불면서 사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콧구멍 둘레의 털이 나 있지 않은 부문을 물었다. 사자는 발톱으로 자신의 콧구멍 둘레에 많은 상처를 낸 다음에야 싸움에서 물러섰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마음이 슬프게 움직입니다. 나는 그 슬픈 마음을 응시하며 그 슬픔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슬픔은 원망을 낳고 원망은 다시 미움을 낳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그냥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작은 원인으로 인해 내 안에 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안에서 장난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 마음 장난은 그냥 일시에 사라져갈 것입니다.살다보면 마음의 장난에 끄달리는 일들이 어찌 하루 이틀이겠습니까. 마음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여 더 깊은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침묵의
범어사 노 스님이 계신 문 앞에는 풍경이 달려 있습니다. 봄이 금정산에서 내려온다는 전갈에 어제는 봄을 맞으러 조왕모귀했습니다. 그런데 노 스님 방을 찾아든 순간 문에 걸린 풍경에 바람이 그네에 매달려 풍경소리가 들립니다.그 풍경은 누군들 기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목탁을 얹으면 목탁에서는 똑똑똑 소리가 날 듯합니다. 상상하면 그냥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풍경소리는 어디를 향해 그렇게 아름답게 노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푸른 하늘을 향해 그리고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노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내 영혼의
중국에선 예부터 가장 뛰어난 사가(史家)의 본으로서 사마천(司馬遷)을 꼽는다. 실상 그의 ‘사기(史記)처럼 오늘날 까지 감동을 주는 역사책도 드물다. ’사기‘를 쓸 때 사만천은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려 애썼다. 그러나 ’사기‘에는 꼭 하나 사실을 의식적으로 왜곡(歪曲)시킨 데가 있다.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은 담(談)이었다. 그래서 그는 ‘담’자를 가진 인명을 모두 동(同)자로 바꾸어 놓았다. 비슷한 얘기가 서예기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에게도 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정(正)’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월(正月)을 초월(初月)이
매화가 이제 꽃을 피우려 합니다. 그 움이 막 터질 것만 같습니다. 꽃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때가 되면 일시에 피어납니다. 꽃들은 어디에 있다가 일시에 피어나는 것일까요.꽃의 개화보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꽃의 개화는 온 우주의 경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꽃이 피면 나는 저 매화나무를 몇 번 찾아갈 것입니다. 봄날 잠 못 이루는 밤의 사연을 매화와 주고받으며 나도 내 삶에 매화의 향기를 담고만 싶습니다.매화가 건네는 향을 내 삶의 바구니에 찬찬히 담으며 그 향기의 고움을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은 잊고
사람은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를 만나야 하며 만나게 되어 있다. 그 만남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사귀어 나가는가가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G.워싱톤은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되 몇 사람하고만 친하라. 그 몇사람도 믿기 전에 충분히 알아보라. 진정한 우정이란 성장이 더딘 나무와 같고 친구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불리한 여러 가지 충격을 겪어 봐야 한다.”그렇다. 서둘 것이 없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충분히 알아보라.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수효를 헤아리는 것보다 양(羊)
우화같은 이야기다. 최근 ‘바티칸’의 한 성직자가 천당의 호구 조사를 실시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현대문명의 극치라고 하는 ‘컴퓨터’에 물어 본 것이다. 지난1천년 동안 승천한 성인들을 대상으로.우선 천당에 입적한 성인은 모두 1천8백48명으로 밝혀졌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탄생 1974년의 역사” 가운데 그 절반이 넘는 1천년동안에 천당에 갈수 있었던 성인은 겨우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은가 하는 사실이다. 세상엔 정말 착한 사람이 드문 것 같다. 1년에 한 두 사람 꼴이니 말이다.더구나 국적별로 보면 동양은 거의 없다시피 하
2016년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합니다. 새해 아침은 누구에게나 꿈을 안겨준다. 그래서도 새해는 좋다. 새해 아침 우리 금정구의 인구가 25만이라면 25만개의 새 꿈들이 우리 금정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셈이다.그 꿈들을 풍선에 담아 하늘에 날려 본다면......, 생각만 해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임에 틀림없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으면 하는 아해들의 꿈,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됐으면 하는 젊은이의 꿈, 사랑이 여물기를 바라는 소녀의 꿈, 당선을 바라는 정치가의 꿈...... 이렇게 작은 풍선, 큰 풍선, 오색의 갖가지 풍선들
살다보면 잊어야 할 것들이 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기억해서 좋지 않은 일들은 잊어야 할 일들이고 아름다운 일들은 기억해야 할 일들입니다.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들은 쉽게 기억을 떠나가고 잊어야 할 것들만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가 봅니다.우리는 좋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미움과 증오라는 좋지 않은 것들에 더 많이 영향을 받고 삽니다. 그것은 미움과 증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에 우리가 더 집착하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 그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음의 시작이 중요하고 그 마음이 어
오래된 사진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느 낮선 나라의 산 밑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멀리 설산이 보입니다. 아마도 중국 운남성 옥룡설산이 어느 지역이었습니다.그 사진 속에서 나는 그냥 내가 느꼈던 느낌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생경한 설산이 바로 지척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로워 감격했던 그 순간들이 떠올라 혼자 지그시 미소 지었습니다.여행은 여행 이후까지도 여행입니다. 여행이 끝나도 여행은 기억으로 남아 나와 함께합니다. 여행할 때의 그 느낌과 풍경과 추억들이 그대로 남아 내 삶이 되고는 합니다. 여행은 그래서 지워지지 않는 삶
맑은 하늘은 찬바람을 보냅니다. 청아합니다. 마치 맑은 하늘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서 청아한 바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사람에 이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맑은 하늘처럼 나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이 내게 보낸 이 청아한 바람을 어디론가 다시 보냅니다. 연락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내 가슴에 따뜻함을 남겨준 사람들에게 이 청아한 바람의 기운으로 소식을 전합니다.감사하다고, 고맙다고, 늘 건강하라고, 감사와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이 우주의 어느 곳으로 보내어 안부를 전합니다.내가 하늘을 향해 미소 짓듯이
난과 인연이 된 것은 약 30년이 넘었다. 젊었을 때는 아파트서 약 250분까지 키웠었다. 그 때 기억으로는 중국춘란 ‘송매’ ‘대부귀’ ‘환구화정’ ‘여호접’ ‘홍도 소엽풍란. 대엽 풍란, 그 중에도 천연기념물 191호로 지정된 제주 한란 등 등 이다.지금도 아파트 베란다엔 죽다 남은 볼품없는 ’일경구화 ‘대일품’ 그리고 홍도‘소엽풍란’등이 우리집 토양에 길들여져 함께 하고 있다.이런 경험으로 난은 욕심을 내 키워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고, 물주기 3년, 난은 꽃을 맺어 10여개월간 관리를 잘 해야 꽃을 피운다는 것, 또 꽃대를
가을이 익어가며 학창 시절 애송했던 시조를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60-70년대를 살아 온 청춘들 마음 한 구석엔 가슴에 와 닿는 시조 한 두편이 남아 있을 것 이다.시조 중에서 특히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어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로 이어지는 이 시조는 얼핏 충효를 강조하는 시속(時俗)의 한 가락같이 생각되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 신뢰(人間信賴)의 ’모럴‘에 굶주려 있는가도 엿보게 된다. 이 시조는 원래 이성계(李成桂)를 떠받들려는 이방
서독의 작가‘마하일-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사람모습을 한 회색 도둑들이 나온다. 그들이 훔치는 것은 사람의 시간이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첩경”이라 꾀어가며 사람들이 은행에 시간을 저축하게 만든다.사람들은 시간을 저축하기 이하여 1분의 1초를 아껴가며 한 때도 쉬지 않고 일해 나간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아이들도“장례를 위해서”라는 구실아래 자유스런 시간을 모두 빼앗긴다.이것은 바로 시간에 쫓겨 사는 현대인의 딱한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할까. 예전에는 하루를 열둘로 갈랐었다.
파도 소리를 듣습니다. 물결이 들고 나는 자리에는 높은 모래 언덕이 생겼습니다. 그 모래 언덕에 앉아 나는 바다 물결을 느낍니다. 오래 바다를 느끼다 보면 바다 물결은 또 다시 마음 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누군가 외로워서 왔을 이 바다. 그리고 이별 그 이후의 아픔을 버리려 왔던 바다에는 오늘도 그 한줌 마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그때 그 마음의 슬픔은 이미 슬픔의 물결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한 맛의 평등함을 이룬 바다에서 슬픔과 기쁨, 외로움과 따뜻함은 하나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나는 왜 사람들이 바다에 와 이별의 슬픔을
가을인가 보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다 감기에 걸릴까 걱정케 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얌잖게 이불을 덮고 잔다. 어린이에게도 잠결의 밤공기가 차가운 것이다. 아직도 장엄한 여름의 행진이 끝나지는 않았다. 피서객들이 버린 욕정과 본능과 허영의 잔골들만이 흩어져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위에는 아직도 따가운 햇볕이 눈부시게 찬란하기만 하다.햇빛에 검게 그을린 젊은이들의 얼굴에도 아직 여름의 입김이 남아 있다. 그들의 눈에도 아직은 여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이나 찬란하던 여름의 향연이 이토록이나 쉽게 끝나리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그
아침저녁 바람이 선선합니다. 가을을 느낍니다. 내 삶의 시간도 이제 가을인가 하는 것을 이 바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봄날 같은 인생의 시간도 가고, 여름 같은 인생의 시간도 갔습니다.나는 이제 하나하나 가을 나무처럼, 내게 있는 것들을 떨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육십이전의 시간이 생육의 시간이었다면, 칠십이후는 버리고 비우는 시간입니다. 하나하나 비우며 그 비워진 자리에의 여백을 맛보아야 합니다.여백이 얼마나 단순하며 여백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이제는 음미할 나이입니다. 오히려 이 조금 쓸쓸하고, 조금은 고요한 이 시간들이 참
가끔씩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그리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이라고 이름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석이라고 이름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그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금 내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따뜻합니다. 사라진 것들이 아직 온기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 가슴 안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때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보낸 사람도 있고, 때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풍경들도 있지만 지금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그림이 그려진다. 슬픔과 기쁨의 그림이 진한 색깔로 그려졌는가 하면 어느새 그리움이나 아쉬움의 그림들이 선연한 물빛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어떤 얼굴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도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그림들이 그려진다. 감정의 전이 현상이다. 기쁜 마음일 때는 기쁨의 그림이, 아픈 마음일 때는 아픔의 그림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굴을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다.“방정환의 /어린이 예찬/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공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고 했다. 정직함이 삶의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고 잘 사는 것은 일시적으로 화를 모면하는 것일 뿐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고 했다.물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남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은 미워한다.”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