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는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주치의가 권하는 신장이식 수술에 실패하고 느닷없이 내 아버지가 고인이 되었을 때, 어릴 적 뜻 모르고 외웠던 송강의 시조 한 수를 비로소 깨쳤다.

수술 당일에야 연락을 받았고, 뇌사자의 것이라는 게 꺼림칙해서 늦은 반대를 했지만 친딸의 것을 이식해도 이보다 더 맞을 수 없다는 주치의 말에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수술 결과는 최악이었고, 약 한 달 동안 세 번의 수술을 받아야했던 아버지는 고통과 싸우다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유언같은 아버지의 메모 한 줄 [나는 속았다]를 들고 상복 차림으로 미친 듯이 경찰서와 병원을 뛰어다녔지만 아버지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만 커질 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부검을 거치고 우여곡절 끝에 육일 장을 마치고 나니, 그 날이 그 해 어버이날이었다. 내가 겨우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술부터 장례식까지 한 달이 넘도록 제대로 먹지도 잠자지도 못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정신을 가다듬는 것.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올해 어버이날엔 유난히 납골당을 찾는 이가 많아서 주차하느라 더위에 애먹고 영전에 겨우 향기 없는 카네이션을 걸고 나니, 삭지 않은 분이 목구멍에서부터 꾸역꾸역 차올라 결국 울음이 터진다. 수술날짜를 숨긴 채 딸네로 와서 평생 처음 밥상을 차려 달라셨지. 밥에 물이 많다고 아이처럼 투정하시기에 다음 번엔 제대로 끓여내 드릴께요 했지.

돌아가심이 애닯은 것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예요. 사무치게 보고싶은 데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이예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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