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남 전 부산시의회 의원

우리 고유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있습니다.
추석절을 지내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입니다.
우린 조상들을 위해 정성으로 추석명절을 차리기 위해 햇과일 등 명절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추석 후 찾아들 ‘증후군’으로 주부들은 몸살을 앓습니다.  그 '증후군'에 시달릴 주부들을  위한 글을 쓸려고 며칠 궁리를 하다가 필자가 ‘구약성서'에서  읽어둔 감명적인 글을 소재로 이 글을 씁니다. 

 딱히 추석에 적합한  글은 아니지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관용어 보다 ‘잠언’ 내용이 가슴에 넣을 말씀이  많아서, 즐거운 추석, 한가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짧은 토막의 글을 씁니다.

 ‘구약성서’의 ‘잠언’을 읽다 보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런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한결 더 의미 심정한 뜻을 새롭게 전달받는다. 대개의 경우 착한사람과 착한 일에 대한  칭송들이 일반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말씀마다의 표현들이 각각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칭송을 받으며 기억되지만 나쁜 사람은 더러운 이름을 남긴다.”
“착한 사람은 생명나무 열매를 맺지만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생명을 잃는다.”
“착한 사람의 등불은 빛을 내지만 나쁜 사람의 등불은 꺼진다.”
“악한 사람은 제 악행을 망하지만 착한 사람은 그 정직으로 피난처를 얻는다.”

착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면 빠뜨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악한 사람이 등장한다. 착한 사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악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곧 이 세상에 선악(善惡)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선(善)에게는 필요악이고, 악(惡)에게는 필요선 으로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칭송받고, 생명나무 열매를 맺고, 등불이 빛을 낼 뿐만 아니라 그 정직으로 피난처까지 얻게 된다. 악한 사람은 오명을 남기게 되고, 생명을 잃고, 그의 등불은 꺼지며 스스로의 악행으로 망하게 된다.

얼마나 분명한 상대적 논리인가. 이토록 분명한 논리 앞에서 더 이상 무엇으로 질척거릴 수 있는가.

*에픽테토스가 말했다.
“당신이 만약 선인이 되고 싶으면, 우선 당신 자신이 악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된다.” 남들이 눈썹 찌푸릴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그대에게 이를 갈 수 있겠는가.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대가 좋은 일을 한 사람인 것을 전해지게 하라. <2013.9.15>

 <금정시론>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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