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다. 서른 세번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 속에 새해가 밝는 것이다. 절간에서 울린 범종은 1백8번이었다. 거기엔 까닭이 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개의 사심이 있다. 탐욕스러움, 노여움, 어리석음, 교만스러움, 의심, 간악한 마음, 이 여섯 개의 마음이 각각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그 뜻이 감각에 따라 다닌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36개의 번뇌가 생긴다. 번뇌는 그러나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도 있었고, 그리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36개의 번뇌를 다시 셋으로 곱하면 꼭 1백8개가 되는 것이다.
이런 1백8개의 번뇌를 하나하나 모두 몰아내자고 1백8번 종을 울리는 것이다. 제야의 범종은 묵은해가 다 가기 전에 1백7번을 치고 새해가 막 밝을 때 마지막 한번을 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형식이라도 좋다. 그렇게 매듭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다. 1백8개의 번뇌가 묵은해와 함께 사라졌다 해도 새해에는 또 다시 새 번뇌가 1백8개 생기게 마련이다. 새해라고 모든 게 바뀌어 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묵은해로부터 연속되기 때문이다. 바뀌어 지는 것은 그저‘캘린더’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1백8개의 번뇌가 새해라고 줄어들 것은 아니다. 1백8개 이외의 새 번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탐욕스러움, 어리석음, 간악스러움......이 모두는 새해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괴롭힐게 틀림이 없다.
그래도 새해란 역시 좋은 것이다. 뭔가 새로운 기대를 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적어도 묵은 해의 온갖 괴로움이며 슬픔이 새해에는 조금이라도 덜어지기를 기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좋은 것이다.
새해, 새 아침.
태양은 찬란하지 않아도 좋다. 그토록 역겨웠던 한해가 이제 완전히 과거속에 묻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꿈도 그리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아직도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도 우리에겐 여간 대견스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초가삼간의 소박한 꿈을 안고 살던 어버이들의 후예인 것이다.
오순도순 그저 평화롭게 살 수만 있으면 그것을 우리는 천만다행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악에 물들지 않고, 부정에 굽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야의 종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것이다. 새해 1백8개의 새 번뇌들이 싹터 오르듯 그렇게 새 아침의 서기가 퍼져 오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해를 살아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터득 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