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절기는 봄으로 접어든다. 지난 겨울은 어느 새 ‘바퉁’을 넘겨 봄을 맞아들인다. 봄 같은 겨울은 사계의 한 매듭을 풀어버린 허전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봄바람은 불어도 내 시름 실어가지 못하네. 봄날은 길기만 해서, 내 한도 끝닿은 데 없구나./

어느 시인의 시 구절, 호수에 배를 띄우고 이런 시를 읊어야 하는 시인의 심정을 오히려 애달프다. 봄을 즐거음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는 시인은 얼마나 불행한가.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봄을 ‘spring으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결(凍結)의 암흑과 긴장에서 풀려나 신선한 햇살 속에서의 약동은 곧 생명의 희열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셜리’는 우수(憂愁)에 찬 동양의 시인과는 달리 이렇게 노래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셜리’가 이 /서풍부(西風賦)를 읊던 시절은 전 유럽이 무서운 겨울에 갇혀 있었다. 혁명과 반혁명이 잇따라 일어나고, 제국주의와 독재는 세계를 질식시키는 것 같았다.

정상배(正常輩)들의 횡행이 정치였으며,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기업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다. 이상(理想)은 경멸당하고 오직 세속적인 정치놀음이 인간을 비참한 지경으로 이끌고 갔다.

그러나 ‘셜리’는 황야를 질주하는 바람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봄은 멀지 않았다/라고 노래했다. 역사는 기어이 그의 노래처럼 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봉건제도는 한겹, 두겹씩 무너져가고, 한편에선 산업혁명의 우람찬 소리가 들렸다. ‘프랑스’의 혁명은 인간의 소리를 쟁쟁하게 들려주었으며, ‘유렵’은 삽시간에 활기와 생명의 행진곡에 휩싸였다. 겨울 속에서 봄을 예언하는 그 시인의 어두운 목소리는 실로 인간에게 봄다운 봄을 안겨준 것이다.

어제는 우수(雨水), 이제 죽은 듯 굳어 있던 땅도 풀리고 수목들은 ‘리듬’을 찾게 된다. 영상 3도의 날씨가 계속되면 갯버들의 가지에선 새싹이 트기 시작한다. 식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4도(C)만 되면 수목들은 생명의 율동을 시작한다.

봄은 다만 식물의 행사로 끝아 나선 무의미하다. 우리도 저 모든 생물들이 겨울을 자랑스럽게 이기고 다시 약동을 시작하듯이 새로운 이상과 희망을 찾아야 한 것이다. 봄은 자연만의 계절이 아니라 인간의 계절로 되 찾아야할 것이다. 새봄과 함께 약동의 의지와 그 힘찬 호흡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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