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매표소를 지나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예불드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오른쪽 숲속 연화교를 지나면 “지장대도장(地臧大道場)”이란 큰 바위 탑이 우뚝 눈앞에 다가선다.

언제나 청정한 마음으로 세속의 티끌을 이내 씻겨가는 아축교는 실개천(絲川)을 이루었는데 문자 그대로 가람으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해탈의 문이다. 금정산 고당봉에서 발원한 명당수는 상류 계곡에서 운반해 온 수많은 크고 작은 자갈들과 두 가닥 사천으로 갈라진 삼각주 지형이 마치 푸른 연꽃을 이룬 곳이라 하여 청련암(靑蓮庵)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금정산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이 하나같이 유난히도 맑고 깨끗한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이겠지만 또한 법당 앞을 흐르는 법수(法水)이기에 더욱 맑은 물일런지도 모른다.  계곡을 이루는 이 맑은 법수는 그 천연의 지형과 더불어 무량광불(無量光佛)로서의 한 송이 또 하나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끊임없이 흘러 왔으리라.

아마도 물조차도 지장대도장으로 그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오직 불심으로 참고 견디면서 만들어 낸 것이 저 유명한 ‘청련야우(淸蓮夜雨)’가 아니었을까?

청련암 주위의 울창한 대숲 사천의 맑은 물소리가 이룬 화음이 아름답다. 그 숲위에 내리는 빗소리도 계곡 사천에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아무리 밤에 많은 비가 온다해도 빗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심오한 조화이리라.

지장대도장이라 법당에 지장보살을 모셨다는 경위를 선승 양익스님으로부터 들었다. 돌로 만든 불상을 금물로 옷을 갈아 입혔을 당시 ‘지장보살’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불상은 그 유명한 보관을 쓴 지장보살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 내력을 전한다.

이곳은 또 하나의 영험한 지장대도량의 구세주이신 땅신이 오묘한 천지 조화의 수호로 씨를 키워 잎과 꽃 그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을 베풀었기에 스님은 법당의 보살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법당 밖에 청동으로 된 높이 7m의 동양 최고의 불상 지장보살을 주조했다.

평소 불심이 깊기로 널리 알려진 양익스님의 일념이 결국 열매를 맺어 불상이 이루어졌으니 자비스런 보살을 우러러 보니, 밝은 광명과 따뜻한 미소,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 하여 그만 보는 이로 하여금 합장하고 그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 부산에서는 그 봉기의 횃불을 처음 밝힌 곳이 이곳 금정구(옛 동래)다. 3월 18일인 동래 장날에는 때 마침 범어사에 있던 금정학당 학생, 승려들에 의해 동래읍에서 다시 커다란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월 17일, 저녁 청련암의 기숙사에서 금정학당 졸업생 송별회에 모인 40여명의 학생들이 결사적으로 거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에 독립선언서 1천매, 태극기 큰 것 1개와 작은 것 1천매를 준비하여 18일부터 19일까지 동래시장통에서 군중들과 시위를 하였는데, 마침내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오고 주동인물 허영호외 33명이 검거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범어사 학생의거 사건』이다.

동래의 3·1운동 진원지가 범어사 청련암이었으며 이곳 금정산 기슭 호국의 암자, 지장대도량에서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한 것은 거룩한 위국충절의 발로라할 것이다.

※ 청련야우(靑蓮夜雨)는 금정8경(金井八景) 중 하나입니다.
※ 금정8경(金井八景)
어산노송(魚山老松), 계명추월(鷄鳴秋月), 청련야우(靑蓮夜雨), 대성은수(大聖隱水), 내원모종(內院暮鐘), 금강만풍(金剛晩楓), 의상망해(義湘望海), 고당귀운(姑堂歸雲)
<1994년 8월 26일자 금정신문 『다시보는 금정산』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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