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에 보면 “때에 따라 처신하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시중(市中)이라고 한다. 옛날 할아버지들은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시중을 잊지 말고 염두에 두라고 했다. 얼핏 들으면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러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처신을 잘하라는 말이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세상에 살다보니 혼자만의 옳은 생각을 실천하기기 어려울 때가 많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다 부정(不正)을 하는데 나만 홀로 그러한 부정을 거부하게 되면 그 집단에서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홀로 소외되기 싫어 함께 부정에 가담하게 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처신하라’는 말씀을 곡해하여 그런 부정을 합리화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 처신하라’는 이 말의 참된 의미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그곳에 알맞은 올바름이 있고 그 장소에 알맞은 사랑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름과 사랑함이란 어질고 올바른 것, 즉 인의(仁義)을 뜻한다.

어느 때나 어디를 가든 그 순간 그곳에서 가장 어진 것이 무엇이며 가장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택하여 처신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곳, 어느 때이든지 인간적인 몸가짐을 갖는 데 게을리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시중(市中)이다.

또한 불류(不流)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화합을 해야 하되 휩쓸리지는 말라’는 말이다. 왜냐 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선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악할 수도 없다. 그 누구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다.

사람의 심중에는 선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누구에게 이러한 두 가지 마음이 있기에 선한 것이면 휩쓸리고 악한 것이면 한 걸음 물러서서 멀찌감치 거리를 두라는 뜻으로 이 ‘불류’라는 말을 새기면 된다. 패거리를 지어 선악을 따지거나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다.

휩쓸리지 않은 사람은 우리는 뼈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귀가 얇거나 줏대가 없어서 남이 하자는 대로 하여 좋지 않은 일에 빠진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천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량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정직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패를 지어 갈라서지 말고 서로 화합해야 한다. 그러나 야합하지 말라. 야합은 악을 약속하는 짓에 불과할 뿐이다. 화합은 선을 넓히고 악을 멀리는 모임이요, 어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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