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 제86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87조는 총리의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은 이와 함께 대통령 유고시 총리가 제1순위로 그 권한을 대행토록 규정하고 있다(71조). 조선시대라면 영의정에 해당하는, 한마디로 나라의 2인자임을 말해준다.

그런 국무총리를 요즘 언론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한승수 총리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새 정부는 총리 권능을 제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 총리를 지명하면서 "자원외교 적임자"로 규정했다. 행정 각부를 통할해야 할 총리에게 자원외교나 시키겠다니. 총리실의 위상을 격하시키겠다는 의도로 비쳐졌다.

실제로 그랬다. 정부조직 개편 과정에서 총리실 직원은 600명선에서 300명선으로 반토막났다. 차관급 자리도 하나 줄었다. 한 총리는 지난 주 기자간담회에서 중앙아시아 방문 계획을 설명하는 등 자원외교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원외교는 대통령의 바람이기도 하거니와 국가적으로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총리실을 이런 식으로 운영해도 되는지 이 대통령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사실 청와대와 총리실의 위상문제는 60년 헌정사에서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사생아로 탄생한 총리실은 우리나라 특유의 제도다. 군사정권 시절 대독총리, 의전총리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총리실은 "의미있는 존재"로 정착된 것이 사실이다.

헌법상의 행정 각부 통할권을 근거로 정책조정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특정사안을 놓고 부처간에 이견이 생기거나 부처 경계가 모호한 일이 발생할 경우 장관급, 혹은 차관급 회의를 소집해 해결점을 찾곤 했다. 노무현 정부때는 책임총리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승수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총리실의 기능을 정책조정자에서 국정조력자로 바꾸어 버렸다. 정무·민정 기능도 대폭 축소됐다. 물론 대통령의 뜻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총리실이 정책조정자 역할을 포기할 경우 대통령한테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각종 정책에 이견이 생길 경우 누군가가 조정을 해야 하는데 총리실의 손발을 묶어 놓았으니 대통령실이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정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이 직접 대통령한테 돌아갈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총리실의 완충 역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비대화를 초래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국회가 열리면 총리는 본회의에 출석, 국정 전반에 대해 국회의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해야 한다. 정책조정 기능조차 갖지 못한 총리한테서 책임있는 답변을 기대하는 것은 코미디 아닌가.

"허수아비 총리"는 국정의 효율적 운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운영할 바에야 총리실을 아예 폐지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대통령 비서실장, 외교통상부 장관, 경제부총리, 국회의원을 지낸 관록의 한승수 총리가 제 목소리를 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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