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 나는 그를 또 다른 나라고 입력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닉네임이나
메신저 대화명까지 또 다른 나였던 그가, 열한 달 후엔 나와 함께 ‘우리’가 되었다.

‘우리’가 되고나면 한 지붕 아래서, 달랐던 취미가 비슷해지고 모난 성격도 둥글어지려니
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렇지 않았다.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각자의 별스러운 노력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3자들이 볼 때, ‘우리’는 평화롭고 조화로워 보인단다.
아마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일이라서 그럴꺼고,
만만찮은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가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한국인은 ‘우리’라는 말에 얼마나 익숙한가.
영어 my mother가 우리 엄마로 일어 私の家族도 우리 가족으로 번역되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럽다.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한국인의 전통이며 문화인 것이다.

불화는 서로간의 차이보다는 이해 부족에서 온다. 다르다고 배제하거나 같아지기를
강요한다면 조화될 수 없기에 하나 될 수 없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겨낸다
했건만, 쌍방의 배려와 노력이 부족하다면 결국 ‘우리’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구국(救國)이 우리라는 개념 덕분에 가능했다.
세계 스포츠대회에서도 우리라서 감동하며, 눈부신 승리도 우리가 창출해 낸다.
역사 속에서 검증된 그 시너지(synergy) 효과를 상기해야겠다. 안팎으로 절실히
‘ 우리’ 되어야 할 때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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