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 석탑에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출토되자, 삼국유사의 서동왕자와
선화공주가 구설수에 올랐다. 여기에 “미륵사 석탑이 무왕 당시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가 서기 639년 세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을 비롯, 우리가 미륵사 창건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비교해서 야사(野史)로 분류되고 있지만, 그 기록이 대부분 정확하다.
선화공주는 <권2:무왕조편>에서 소개된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백제의 서동(훗날 무왕)이 신
라의 아이들에게 서동요라는 *참요(讖謠)를 부르게 하였고, 신라 진평왕은 마침내 선화를 귀양
보내게 된다. 길목에서 기다리던 서동이 목적하였던 대로 선화를 취하여 왕비로 맞이하였고,
이후 선화의 바람대로 연못을 메워 절을 세우니 이것이 미륵사였단다.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을 만나러 간다는 내용의 서동요는 신라 14수의 향가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며, 진평왕 당대에 불리었다는데 이견(異見)은 없다. 그렇다면 선
화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다. 또 역사적으로 당시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사이가 좋지 못해서
혼인이 불가능 했을 꺼라는데, 맞다! 그래서 선화를 사랑한 서동에게는 참요가 전략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리라.

이번에 출토된 사리봉안기가 미륵사 석탑이 완공된 서기 639년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 무왕은 서기 600년부터 634년까지 40여년을 재위했다.
거대한 미륵사 창건의 동기부여부터 완공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 지 누구라서 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추정(推定)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반증에 의해서 얼마든지 전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섣불리 단정하지는 말자. 자칫 우리들의 경솔함으로 인해 문학/정치적
으로 그 가치가 높은 [서동요]와, 국경도 초월한 역사적인 로맨스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
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다.

*참요: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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