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金井山)에 올라 동쪽 저 멀리 바라보면 동해가 하늘인 듯 선하게 떠오른다. 그건 마치 무색계(無色界)와 색계(色界)의 살피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정세계(淸淨世界)사이에서 완충 대를 이루 듯 고요히 명상(冥想)에 잠기고 있는 동해(東海)다.

이 봄 아침에 부산의 진산(鎭山) 금정산이 겨레의 바다 동해를 마주하며 무언(無言)으로 나누는 이야기가 내 귀에 도란도란 들려오는 듯하다. 산과 바다는 오랜 예로부터 서로 뒤채어 왔다.

예전엔 바다 밑으로 누워 있던 곳이 오늘엔 산이요. 옛 산은 바다로 잠겨든 것이다. 하여 산과 바다는 그렇게도 잘 상화(相和)하는 가 보다. 그런 금정산이요. 그런 동해…, 봄을 잉태하는 금정산은 그래서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완연한 봄인데도 살갗에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 도심이 삭막해지면서 차라리 인적 없는 숲이라도 찾고 싶지만, 금정산이 가까이 있으므로 굳이 먼 길을 떠날 건 없다. 봄이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만남을 기다려 온 여인처럼 금정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금정산은 문화를 간직한 부산의 진산이다. 갖가지 기암괴석은 유구한 역사를 품고 금정산에 고이 안긴 듯 서 있고, 마냥 말이 없는 돌은 스산한 겨울을 지새우며 봄을 잉태하고 있는 것만 같다.

등산로를 따라 금정산 제4망루를 걸어가면서 동쪽으로 보니 동해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남산동을 바라보는 의상봉 밑엔 솔숲이 굽이굽이 하늘로 길게 상록안개를 피워 올리는 신기루이기나 하듯이 허공에 드리워 있고, 그 아래엔  한창 새잎을 돋우는 나무들의 기운이 싱싱하다.

미국의 초절주의자(超絶主義者) 헨리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일찍이 “우리네 인생은 사소한 일들로 흐지부지 헛되이 쓰여지고 있다.”고 깨닫고 젊은 나이에 깊은 숲에 틀어박혀 ‘윌든(Walden)"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적절하게 뽑아 놓은 소로우의 잠언(箴言)이 새삼 가슴을 세차게 친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든 것이며, 헛된 삶을 살았구나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을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녕 불가피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한 스파르타인처럼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 인생은 실패작이었다”는 마음속의 소리를 스스로 듣는다. 헛된 인연들에 휘말려 무의미한 괴로움으로 생을 낭비한 어리석음과 준엄한 생을 내팽개친 미혹 속에 똬리를 틀고 지새운 것이다.

나는 졸음에 겨운 햇빛으로 멱 감으며 용트림하듯이 뻗쳐 있는 등산길을 힘겹게 더듬어 올랐다. 애틋한 사연이 어려있다는 ‘금샘’이 아득히 바라보인다. 지금도 토박이들은 믿지 않고 속설이었던 곳이 진짜라며 우긴다. 하지만 고증이 이미 거쳐진 ‘금샘’에 나는 눈길을 박으며 아둔한 생각들에 문득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둔하기에 나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흘려 본다.

한해가  가고 새해로 바뀌는 1월 보다, 겨울이 가버리고 봄이 완연한 이즈음에 더욱 시간의 흐름, 세월의 변화가 가슴 깊이 느껴진다.  허망하게 지새버린 시간을 되돌이키며 망연해지는 것이다. 전에는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아 동물처럼 긴 겨울잠을 자고 다시 태어나듯 봄을 기다리며 시간을 생략하고 싶다.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을 비로소 실감한 것은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였다. 시간이라는 화살이 저 혼자 내달려 나는 표적을 잃은 궁사처럼 보이지 않는 화살을 허공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실감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엔 밀려 내 나이도 그렇게 더해 가지만, 시간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 두려웠던 때도 있었다. 

또 겨울을 보내고 새봄이 오는구나,  그들이 뿜어내는 연초록에 이제는 가슴이 저려온다. 거둔 것도 없이 또 이렇게 시간이 강물에 떠밀려 가는구나하고 젊음에 집착한 적은 있으나, 텅 빈 헛간 같은 가슴에 나이만 쭉정이처럼 쌓이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생략했을 뿐이다.

늘 사람을 만나는 너무 밀착된 삶을 살면서 휴식이라는 것을 모른 채 삶에 버거워하며 한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진실을 위한 한 줄의 글을 남기려고 오늘도 나는 결코 잃어 본 적이 없는 고집스러운 품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를 사랑했고 늘 자연 같은 사람이고자 했다.

찬란했던 젊은 날들을 왜 그토록 힘겹게 보냈을까? 무엇이 그토록 내 삶을 힘겹게 만들었을까? 나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되뇌어 보았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판에 박힌 틀에 갇히지 않고 열린 사고방식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 지나가 버린 봄날들은 따스한 향기로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회고에 사로잡힌다.

내 안에서 또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인가? 허지만 내 인생은 이미 희끗희끗한 반백의 볼모가 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하여 저무는 즈믄해를 금정산에서 보내면서 찬란한 햇빛이 구름사이로 온 누리에 펼쳐지듯 내 앞에 역사도 그렇게 찬란하게 저물고 또한 새롭게 열리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역사도 인생도 마냥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을 것일 게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잉태하고 기쁨 속에서도 서러움이 도사리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역사요, 인생인 것이다.

나이 탓일까? 그런저런 골똘한 상념과 더불어 힘겹게 올랐던 금정산 오솔길을 내려서는 내 온몸에 땀이 베인다. 힘드니 마느니 하는 것은 나일 따름, 금정산은 의연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버티고 있을 뿐 말이 없다. 그렇게 금정산은 소리 없는 메아리로 내 상념에 반응한다.

그것이 대자연의 섭리인 것을 이제야 새삼 느끼기라도 한 듯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을 파고드는 천진한 설렘을 마을에 안으며 나는 햇빛 흠뻑 머금은 금정산을 등지고 가벼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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