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작가 이호철

(편집자 주. 6.25,  정치도 결국은 세상의 이야기. 또 인간사의 이야기 이다.  멋진 정치인도 세상일의 일부. 그러나 대부분 정치를 하는 사람은 표를 달라할때 뿐, 그렇지 못하는것 같다. 그것도 세상사이다.  우리가 잊어선 안될,  정치인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낸 문화일보 25일자, 파워 인터뷰 "이호철" 소설가 기사를 전재 한다.)
▲ 올해 팔순의 이호철 작가는 아직도 현역이다. 이 작가가 지난 21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이호철 작가가 21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의 재단 사무실 부근의 한 숲길에서 사색에 잠겨 있다.

 노익장(老益壯)이라 해야 하나. 명불허전(名不虛傳)인가.

이호철(79) 소설가는 올해 팔순이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현역일 뿐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은 아직 펄펄하고 감수성은 더욱 치열하다. 올 들어서도 그는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이란 책을 펴냈다. ‘작가는 사는 만큼 쓴다’는 글쓰기의 철학을 가진 그다. 어느 하나 무게가 실리지 않은 것이 없는 그의 다작(多作)은 삶의 폭과 깊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택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의 전원에 둘러싸인 사무실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재단을 하나 만들었어요, ‘이호철문학재단’. 3월11일 제 팔순잔치 때 제자들이 공개했는데…. 이어령 선생도 왔고. 이재오도 왔어요. 이재오는 과거에 복막염으로 고생할 때 내가 보증을 서서 겨우 수술할 수 있었어요. 지금처럼 ‘거물’이 되기 전에는 세배도 몇 번이나 왔었는데…. 이재오가 옛날 민중당 했을 때 얘기지.” 이 작가는 재단 사무실 부근에 ‘이호철문학관’도 세워진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재단에서는 남북관계 일 좀 하려고 해요. 내가 1955년부터 남북관계에 천착하고 있잖아요.” 1955년이라면 생애 첫 소설인 ‘탈향’이 ‘문학예술’에 추천되면서 이호철 이름 석 자가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한 해다. 분단, 남북관계, 통일 등은 이때부터 56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문학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소재들이 됐다.

“남북관계라는 게 뭐 DJ(김대중)나 노무현이나 그런 수준의 것도 있고, 이명박 수준의 것들도 있는데, 난 문학이니까 문학 쪽의 수준으로 해야죠.”

이 작가가 ‘문학의 눈높이’로 하고 싶은 남북관계의 역할이란 게 뭘까. “역대 정권이 하지 못한 거 있잖아요. ‘북한은 독재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 합니다. 정권에 있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 직접 만나 ‘독재 안 된다’고 얘기하기 힘들잖아요. DJ나 노무현이 북한에 대해 독재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못했잖아요. 문학재단에서 그런 얘기 하려고요. 더 이상 독재는 안 된다고. 그런데 이게 워낙 가파르고 민감한 문제라서 뭐라고 딱 집어 그렇게는 못하겠고… 니네 아들 손자한테 권력 주는 거, 몇 대까지 줄줄이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우리 7000만 이웃이 편하게 살 수 있는 터를 지금부터 멀리 보면서 잡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얘기하려고 합니다.”

북한 독재를 더 이상 마음속의 비판영역으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은 ‘신념 이상’이다. “아프리카나 중동도 보니까 독재가 안 되지 않습니까. 3대는커녕 부자세습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북한의 권력 승계가) 증손자 고손자까지 할 것 같아요.”

이호철 작가는 ‘중국활용론’을 꺼냈다. “내가 최근 글을 하나 쓰고 있어요. 소설이 아니고 논문인데, 제목이 ‘오늘의 중국과 우리네 남북 문제’입니다. 조만간 나올 겁니다. 앞으로 소설이나 문학 그런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남북관계나 통일 등) 그런 일도 하겠다 생각했어요. 야권이나 정치권, 이명박, DJ도 모두 큰일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거는 ‘이북의 독재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알리는 겁니다.”

“손학규나 이재오 만나면 이 글을 읽어보고 뜻이 맞으면 재단에 기금 같은 거 좀 내라고 해야겠어요. 중국과 연계해 북한에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중국을 잡아야 하거든요.”

이 작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을 오갈 생각이란다. “중국에서도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협회나 단체나 뜻 있는 개인들을 만나야죠. 아무래도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북한관계가 좀 곤혹스러울 것이기 때문에… 시민이나 단체 등을 활용해서 말이죠. 중국 사람 불러 심포지엄 같은 것도 하고요.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인데….”

이 작가는 “뜻 있는 사람들이 좀 도와줘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 “여당 사람들도 좀 나서고, 야당 인사들도 팔짱 끼고 앉아 있으면 안 돼요. 내 글 읽고 나서면 좋겠어요. 정몽준 같은 사람도 따지고 보면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잖아요. 이런 일 할 만한데….”

왜 북한 정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토록 중요해졌을까. 이호철 작가의 답은 명확했다. “한국은 벌써 민주화됐잖아요. 이제 북한 정권의 성격이 변해야 해요. 독재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걸 못해요. 내 개인적으로 60년 가까이 소설을 써왔는데, 남북관계가 기본 바탕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디 이호철만의 문제겠어요. 남녘사람들 북녘사람들이 모두 두 세대 이상을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겁니다. 평생 내 문학이 그래 왔고, 앞으로도 북한을 어떤 식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게 평생의 과제나 다름없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은 어때야 합니까.

“당장은 통일 생각 말아야 해요. 너무 무거워. 1980년대부터 무슨 독립운동하듯 깃발들을 들고 나왔는데, 그런 식으론 안 돼요. 마치 자기네 주장 반대하면 죽일 거처럼 하고 그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깃발 들고 나오는 식이 아니라면 대안은 뭔가요.

“너무 무겁게 통일운동 하면 안 돼요. 지금 우리 한반도 문제를 거론하는 양태나 언설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이고 무겁다는 말이에요. 통일은 물이 차서 넘치듯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오늘의 땅을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살갗에 자세히 와 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면회소 같은 거 많이 설치해야지. 편지 왕래도 많이 하고. 하루아침에 통일하자고 되는 게 아니니까. 한솥밥 먹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자기네 형편만큼 만나고 헤어지고 그런 게 필요해요. 장사꾼이나 학자들이나 농사짓고 고기 잡는 사람들이 언제든 기회가 돼 한솥밥 먹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통일의 시작이에요. 전 그걸 ‘한살림통일’이다, 그렇게 불러요. 사는 형편만큼 서로 오고 가고 하면서 친분이 생기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

정치권이나 깃발 들고 나온 사람들이 부르짖는 말들이란 게 죄다 지당한 논리들이 있어 보이지만 ‘백년하청’이라고 이 작가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어쩌겠다는 결론이 없어 못내 지겹다고도 했다. 좀 쉽게, 정신이 번쩍 들게, 장작 빠개듯이 빠개서 보여주는 일은 없겠는지, 그는 묻는다. 이 작가는 서재에서 책을 한 권 빼들었다. ‘분단 60년의 남북한 살림살이’(2006년). 겉표지를 넘겨 백지 위에 ‘허민 仁兄 惠存’이라고 쓴 뒤 사인을 하고는 “이 안에 다 있어요. 함 읽어봐요”라고 건넸다.

―역대 정권의 남북관계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DJ나 노무현은 북에 대해 너무 과했어요. 길을 잘못 들였지. 이명박은 거꾸로 너무 세게 나가서 문제지만. 분단 이후 남이나 북이나 권력이 너무 고압적인 게 문제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이승만은 망명하고, 박정희는 총 맞고, 전두환은 백담사 갔다 오고, 김영삼 김대중은 자식들이 형무소 가고. 뭐 이렇게 보면 한국은 이제 권력이 백성들 수준으로 내려왔잖아요.”

이 작가는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나이 18세. 남침 두 달 후인 8월26일 경북 울진까지 왔지만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돼 후퇴하다가 10월4일 강원도 양양의 한 바위 앞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리고 열흘쯤 뒤 강원도 흡곡 인근에서 천운으로 풀려난 뒤 고향인 함경도 원산으로 돌아간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지긋지긋하고요. 그해 9월 추석을 맞으면서 고향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고향은 어찌나 가을 햇살이 맑았는지.”

―아무리 지긋지긋해도 그 경험이 오늘의 이호철을 있게 한 것 아닌가요.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당시 참전과 포로, 귀향과 월남 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내 인생도, 내 작품도 없었겠죠.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게 포로 이후 고향에 돌아갔다가 탈향해 월남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았겠습니까. 어림없죠. ‘독재 타도’나 외치다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나 악명 높은 ‘교화소’에나 갔겠죠.”

―팔순에 맞이하는 6·25의 감회가 더 새롭겠습니다.

“나이 80에 분단문학 어쩌고 하면 오그라드는 거 같아서. 그냥 쓰고 싶은 거 자유롭게 쓰는 건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문학의 시작과 끝은 남북문제이네요. 6·25가 없었다면 내 인생도 없었겠지만, 그런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사는 만큼 쓴다. 이 작가의 문학은 따라서 분단이라는 역사적, 정치사회적인 현실과 철저하게 결합되어 있다. ‘탈향’ ‘나상’ ‘탈각’ ‘파열구’ 같은 초기 소설에서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젊은이들의 내면세계를 그렸다. ‘닳아지는 살들’ ‘소시민’ ‘서울은 만원이다’ 등에서는 작가적 체험을 민족분단의 시대상황과 강렬히 접합시켰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 그는 독재에 대한 저항을 통해 암울한 정치사회적 현실이 분단이라는 시대상황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된다.

―1955년에 첫 소설을 내신 뒤로 역사적 굽이마다 이호철 문학의 흐름들도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큰 흐름은 분단과 통일입니다. 사실 북한이 지금 불쌍하잖아요. 품 넓게 안아 들일 필요가 있다, 전 이런 주장을 폅니다.”

―1970년대 이후 반유신, 반독재 투쟁과 문인 참여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이념적 토대는 뭐였습니까.

“난 평생 천관우 선생을 존경했어요. 그분이 주도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는 김재준, 이병린, 함석헌 선생 등이 참여했죠. 민주주의 수호가 지상목표였고, 좌파 노선은 안 된다는 생각은 그 당시부터 분명했습니다. 그 뒤에 장일순, 이영희 이런 사람들이 들어왔고요. 1974년 1월7일 명동성당 앞에서 시국성명을 한 뒤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투옥됐지만 그때도 빨갱이와는 관계가 멀었어요.”

그는 굳이 자신의 이념적 토대를 밝히라면 ‘반독재 민주화’라고 했다. “내가 좌익운동 한 게 아닙니다. 좌익운동은 1970년대 말에 노동자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민중운동으로 넘어가면서 등장했어요. 그러다가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폭압적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거기 맞서 폭력적인 좌익이론이 자리 잡게 된 겁니다.”

이 작가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시절인 1987년 6월 ‘직선제 쟁취’ 성명을 주도했고, 이후 6월항쟁과 6·29선언이 나왔다. “1987년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쟁취하면서 저는 문학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한국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거니까요. 남은 건 북한의 민주화죠.”

―그렇다면 이호철이 1990년대를 전후해서 변했다는 말은 안 맞는 거군요.

“저는 일관됐죠. 일관되게 좌익운동은 배척했고, 민주화운동을 해온 겁니다. 남한이 민주화했으니 이제 북한을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그 일관성에서 나온 겁니다.”

―선생님이 추구하는 분단 극복을 위한 소설적 기법은 뭡니까.

“남북이 분단된 1945년 이후 제명에 못 살고 죽은 조만식, 송진우, 김구, 여운형, 박헌영, 이승만, 조봉암 같은 사람들 모두 불러내 대화를 하는 겁니다.”

―역사와의 화해인가요.

“뭐 그런 거창한 개념화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제쳐 놓습니까. 죽은 자들이 어울리고 대화하는 마당, 그런 터가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사연 다 들어주고.”

이호철 작가가 지금까지 쓴 글이 약 250편 된다. “내 문학의 정수요? 나 보고 꼽으라면 ‘남녘사람 북녘사람’ ‘소시민’ ‘남풍북풍’ ‘서울은 만원이다’ 이런 정도고요. 단편으로는 ‘닳아지는 살들’ ‘판문점’ ‘큰산’ ‘탈향’ ‘나상’ 등이죠.” 이 작가는 지난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 하나를 소개했다. “서점에 가니 ‘닳아지는 살들’ 소설 번역본이 브라질의 문학평론가 겸 대학교수가 쓴 평론과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브라질 교수는 평론에서 ‘이 작품은 고급이다. 전 세계에서 단편집을 하나 만든다면 이 작품만은 반드시 들어가야겠구나 하는 그런 작품이다’고 썼더군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많은 작품 중에 딱 한 권만 고른다면요.

“역시 ‘남녘사람 북녘사람’이겠죠. 1950년 제가 국군에 포로로 잡힐 때 일을 갖고 쓴 거예요. 이후 1996년 소설을 내기까지의 내 삶과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남녘사람 북녘사람’은 1999년부터 폴란드, 일본, 독일, 프랑스, 중국, 미국, 멕시코, 헝가리 등에서 줄줄이 현지어로 번역되면서 전 세계 10여개국의 말로 소개됐다. 노벨문학상을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그게 설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노벨상) 생각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하늘이 하는 일이죠. 그런데 올가을쯤 내 팬클럽이 할 거라고들 하데요. 올해 10월쯤 노벨상 추천위원회에 제 작품을 후보로 올리는 작업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 글을 쓴다. 35세 때인 1957년 분단문학 ‘오돌할멈’을 발표했다. 그후 80이 다 된 지금 ‘오돌할멈 손자 오돌이’가 장성해 겪는 이야기를 연작 형태로 내고 있다. 조손(祖孫) 3세대에 이르면서 겪는 분단시대의 삶!

그가 분단의 비극적 파편만을 끝없이 반추하며 ‘시지프스의 도로(徒勞)’를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처럼, 그의 문학인생은 탈향으로 시작해 분단시대를 온몸으로 이겨내며 통일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귀향의 가슴 벅찬 여정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금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