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다인 시흥포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 여자가 바다를 걸으며 고독을 즐기는 것 같아요.'

*바람이 강하게 붑니다. 밤새 덜컹이는 창문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듭니다. 바람이 불면 내 마음도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때마다 차곡차곡 쌓여 있던 내 마음속 기억의 서고도 어지럽게 나부낍니다.

 바람이 부는 날, 내 기억의 서고에서 내게 날아온 기억의 책 한권, 그것은 내 어린 날 방황의 일기였습니다. 기억의 서책을 한 장씩 넘기며 나는 그날의 치기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상 전부일 것만 같았던 그날의 내 고뇌와 가치와 철학들이 이제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로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세월이 가면 다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흐려져 가슴에 안아도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시간의 힘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파하지 말고, 내일 아파하십시오. 그러면 그 아픔이 또 다른 추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순간 바람의 투명한 손길을 보았습니다. 형상 없는 것에서 바람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바람은 이제 내게 추상이나 먼 것이 아니라 가깝고 구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 바람을 부르고 친구를 만나러 가듯 바람을 만나러 갑니다.

바람 속에 서 있으면, 먼 내과거의 시간들을 만날 수 있고 잊었던 그리운 얼굴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바람 속에는 다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가러진 내 유년의 시간들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유랑하고 있었고 그리운 얼굴들 역시 바람이 되어 숲과 계곡을 여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이 되어 다가오는 그 시간들과 얼굴들은 아주 잠깐씩 나를 스쳐갈 뿐입니다. 언젠가 나도 바람이 되어 이 산야와 하늘을 떠 돌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그리워하고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다가가 잠깐 미소짓고 또 떠나겠지요. 이 즐거운 떠남이 정말 좋습니다. (2016.1.25)

키워드

#N
저작권자 © 금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