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사나이가 벼슬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한다. 참으로 벼슬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그 수단(手段)을 무슨 짓이라도 한다.

*코로나로 힘든 때이라, 율곡의 묵화를 캡쳐하지 않고, 아름답고 맑은 품격을 가지라고 오름 사진을 게재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때이라, 율곡의 묵화를 캡쳐하지 않고, 아름답고 맑은 품격을 가지라고 오름 사진을 게재합니다.

 묵화(墨畵) 한 폭을 본다. 시원하다. 우중(雨中)에 촌노(村老)가 거문고를 들고 간다. 다 해진 지우산(紙雨傘)을 펼쳐 든 모습은 오히려 삽상(颯爽)한 느낌을 준다. 속세(俗世)를 훌훌 떠나기라도 하는 듯 활달하다. 우리의 옛 범부(凡夫)들에겐 그런 해탈(解脫)의 멋이 있었던 것같다. 사람은 때때로 낙천적(樂天的)인 성품(性品)을 가질 만도 하다. 율곡(栗谷)의 ‘우중포금도(雨中抱琴圖)’.

당시(唐詩)에도 이런 풍정(風情)에 넘친 표현이 있다. 낙양시인(洛陽詩人) 독고급(獨孤及)(725~77년) 의 시(詩). 방금 비가 겐 하늘이다. 시인은 명금(名琴)을 들고 산에 오른다. 술잔을 기울인다. 큰 뜻은 덧없는 세사(世事)에 쫓기어, 나아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신세로 만든 무상(無常)한 세월을 한탄한다. 세상은 어수선해서 관군(官軍)이나 무신(武臣)들은 갑옷을 걸치고 서성댄다. 시인은 세속을 아랑곳없이 유자(儒者)의 옷을 걸치고 밭일이나 하며 돋운다.

‘...내 인생은 얼마나 남았을까. 태반(太半)은 근심에 싸여 보냈거늘. 고향을 떠나, 오늘 슬픔의 구름이 개자 비로소 알았네. 탁주(濁酒)는 과연 현자(賢者)의 술이군.’

비단 시인만의 심회(心懷)일까. 해탈의 경지는 동양인(東洋人)의 무변(無邊)하고 깊은 심상(心像)이 아닌가. 이조회화(李朝繪畫)의 전통 속에 문인화(文人畵)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지만, 율곡의 그림은 좀 귀하다. 도무지 그것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조회화는 전기(前期)(15, 16세기)와 후기(後期)(17, 18세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이른바 북종화(北宗畵)의 전성기이며, 후기엔 남종화(南宗畵)가 등장했다. 후기에 들어 우리의 묵화(墨畵)가 화제(畵題) 있어서 중국화(中國畵)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기 것은 흥미있다. 그것은 회화사(繪畫史)의 중요한 전기(轉機)를 이룬다.

그중에 직업적인 화가로는 겸재(謙齋)를 들 수 있다. 그는 송림(松林)이나 암벽(岩壁)등을 상상(想像)의 세계 속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고 한국적(韓國的)인 풍경에서 ‘스케치’했다. 또 단원(檀園)같은 이는 서민생활의 정경 등을 그려 회화의 세계를 넓혔다. 그의 묵화 속에선 이조(李朝)의 생기(生氣)와 야성미(野性美)가 엿보여 한층 감동(感動)을 자아낸다. 그러나 ‘아마추어’화가에 견줄 문인화의 그림들도 한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산수화보다도 사군자(四君子) 등을 그리며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문기(文氣)에 주력했다, 빳빳한 털로 맨 갈필(渴筆)을 가지고 탈속(脫俗)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높은 교양과 인품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는 율곡(栗谷)도 그런 인격자이고 보면 묵화(墨畵) 한 폭쯤 없을 수 없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정치가(大政治家)인 율곡은 그 묵화(墨畵)속에서도 대인(大人)의 품격을 돋보이게 한다.

‘더러운 사나이가 벼슬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한다.’ 참으로 벼슬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그 수단(手段)을 무슨 짓이라도 한다.‘ 율곡의 말이다. 우중포금도(雨中抱琴圖)의 사나이는 그런 졸장부(拙丈夫)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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