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살아생전에 아들딸들이 결혼하기를 소망한다. 결혼한 자녀들을 보면 이번엔 또 후손까지도 보고 싶어 한다.

이제 할아버지는,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어린 손자의 모습을 보며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의 화신이 재현된 듯한 감회에 젖을 것이다.

손자의 손을 만지며, 혹은 뺨을 비비며 노인을 정말 자신의 혈육이 이처럼 생명감에 넘쳐 다시 꽃피고 있는 것에 감동할 것이다. 이것은 평범하지만 더 없이 감동적인 인간‘드라마’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두고 이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흐름’을 보아왔다.

인간은 어린 시절, 청년, 그리고 성년시대를 이 가족 안에서 보낸다. 우산 가족들의 도움을 받는 일에서부터 그, 가족을 돌보아 주는 일로, 그 후 노경에 이르면 다시 그 가족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한 인간의 생애는 대저 그런 윤회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 유전은 그렇게 순조로운 ‘사이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코를 훌쩍거리던 아들은 어느새 장성해서 자신의 동년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지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사실 그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기도 한가.

 그러나 그 부모가 미소짓고 있는 얼굴엔 어느새 적막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다. 자손들의 눈길과 마음은 그 따뜻한 미소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언젠가 TV의 연속 ‘드라마’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미국 유학을 갔던 아들이 결혼하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일을 하며 그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던 노부부는 얼마나 대견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자부의 눈에 그 노부모는 귀찮고 비위생적이며 비능률적인 존재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노부모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스럽고 자신이 부족한듯한 불안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것은 그나마 ‘해피엔딩’의 드라마 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얘기가 드라마 아닌 현실로 재현되어 세인의 빈축을 사고 있다. 노부모는 사직 당국에 며느리를 고발까지 하고 말았다.

 인간의 본성은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의 수양은 그 어버이를 사랑하게 한다. 도덕이 근간을 이루지 못한 교육이 빚은 악덕 ‘드라마’라고나 할까. 부모도, 자손들도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쓰디 쓴 한 교훈이 됨직하다.

*발가락이 닮았다...동래 어느 의사가 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다.
*발가락이 닮았다...동래 어느 의사가 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작권자 © 금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