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을 앞두고 범어사에 연등이 환하게 달렸다. 연등은 사바세계의 어둠을 밝혀주는 데 그뜻이 있다. 연등은 불교에선 부처님의 지혜가 밝은 것을 뜻한다. 그래서 법당이나 그 주변엔 등용이 있게 마련이며, 이것은 불타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을 등불을 높이 처들어야 보이는 존재는 아니다. 불타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스스로 찾으라는 것이다. 그 말은 등불을 밖에 켤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속서 켜라는 뜻도 된다.

우리가 마음 속을 환희 밝혀주는 등불을 저마다  켤수 있다면 열반의 경지를 멀리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그「환한 마음」이 그런 환희를 갖게 해준다. 마음에 불을 켠다는 말을 『각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충분히 갖고 있는 착하고 슬기로운 마음을 어둡게 덮어 두고 허황한 심상을 찾아 방황한다. 속되고 허무한 탐욕 앞에 눈을 부비며, 이기심으로 손이 떨린다.

탐욕이나 이기심은 모두 나 아닌 다름사람에게 부당한 고통을 준다. 남의 고통과 괴로움을 보고도 눈감는 사람을 자비로운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세상에 충만할 때 그곳은 인간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

 인간회복의 어느 때부다 절실한 그것은 불교의 표현을 빌면 불성의 회복이랄 수 있다. 부처님은 그 불성의 회복을 위해 인간에게 벅찬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즉신성불』, 자기 자신속에 가려져 있는 그 『부처의 마음』을 오로지 자각으로 찾으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각은 안은 자리에서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단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불교에선 이것을 보시라고 가르친다. 「나」아닌 남에게 겸손히 봉사하는 정신과 행동, 뭇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것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한결 밝고 깨끗해질 것이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봉사하고, 기업인은 또 근로자에게 봉사하며, 교사는 또 학생에 봉사한다. 이런 봉사의 분위기는 인간에게 불성에 빛과 생명을 불어넣어, 저마다 마음속엔 등을 밝혀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탐욕과 노여움과 이러석음이 타고 있는 「검은 등불」들이 먼저 꺼져야 할 것이다. 그것도 역시 우리의 마음에 밝은 등불을 켤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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