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자리면 앉고 설 자리면 서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는 나를 나 자신이 언제나 살펴 두라는 말과 같습니다.
경솔하고 건방지면 이를 모른다는 것이겠죠.

내가 제일 잘났고 내가 제일이라고 자만하는 사람은 천하에 제일가는 바보인 셈입니다.
왜 나를 몰라주고 알아주지 않느냐고 투정하는 사람은 천하에 제일 못난 천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목수와 노인이 함께 길을 가다 쉬었습니다.  마주보이는 앞에 묘가 있었고 둘레에 큰 소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묘를 둘러싸고 있는 노송들이 곧지 않고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굽은 소나무들을 보고 목수가 못난 소나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노인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굽은 소나무가 조상을 지켜준다.” 이 말을 들은 목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경솔했음을 빌었습니다. 그 목수는 왜 빌었을까요?
소나무를 집 짓는 재목으로만 보았던 까닭입니다.

원숭이 머리에 관을 씌우고 도포를 입힌다고 사람이 됩니까?
남의 흉내나 내면서 나를 모르면 겉만 사람일 뿐입니다.
내가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나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찰기(察己)가 아닙니까.

온 세상을 내 거울로 마주하는 사람은 자신을 잊지 못합니다.
거울 앞에 서면 보이는 것은 내 얼굴이지만
만물을 바라보면 내 마음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관물(觀物)이 아닌가요!

무엇인가를 편애(偏愛)하는 탓으로 괴로워하지 않는가?
무엇인가를 두고 고집을 부려 주변을 어지럽게 하지 않은가?
무엇인가에 탐욕스러워 굶은 개처럼 후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내 자신을 향해 자문해보면
나는 악몽 같은 가위눌림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나를 살펴라(觀物察己).
정이천(程伊川)의 이 말은 맹자(孟子)의 자반인 셈입니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 살피십시오.
이것은 자반(自反)이요 찰기(察己입니다.

지금 떵떵거려도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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