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보면 엉뚱한 오해를 받는 일이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가르치기를, 배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을 지나다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혹시 남이 보고 ‘배딴다. 참외 딴다.’ 하는 오해를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오해처럼 괴로 운 것은 없다. 오해를 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겠지만, 오해를 받는 사람의 입장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오해를 풀기가 오죽이나 어려우면 버선목도 아니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하는 한탄의 넋두리가 생겼을까!”

오댈로는 오해 때문에 질투를 하고, 질투 때문에 정숙하기 짝이 없는 그의 아내 데즈데모나를 죽이는 큰 실수를 범하였다. 오해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해롯왕이 아기 예수를 잡아 죽이려 한 것도 오해 때문이고, 가룟 사람 유다가 스승인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도 오해 때문이었다. 헤롯은 그 아기가 자라 장차 자기의 왕위를 노릴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살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참극을 연출하였고, 유다는 그의 스승이 왕위에라도 올라 이스라엘에 군림하리라 믿었다가 그 기대에 어긋난 사실에 크게 실망하여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겨준 것인지도 모른다.

오해는 모든 역사상 비극의 최대 원인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오해처럼 풀기 힘든 것은 세상에 없다. 오해를 풀기가 오죽이나 어려우면 ‘버선목도 아니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하는 한탄의 넋두리가 생겨났을까! 어설픈 변명이 오히려 더 큰 오해의 원인이 되는 수도 적지 않다.

오해가 있을 때는 변명을 하려 말고 잠자코 있는 것이 상책인 듯하다. 오해가 오해인 다음에야 어느 때인가는 풀리게 마련인데 구태여 푸느라 서투른 재간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해를 오해대로 간직하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엄청남 오해 속에서도 굽힘없이 제길 을 가는 사람- 누가 뭐래도 변명할 생각조차 않는 사람- 역사의 미래는 그런 사람 편에 있는 것이다.

19세기의 미국 철인 에머슨은 ‘위대하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거니와 오해를 두려워 않은 것이 위인이 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오해를 겁내지 않을 수 있을까?
명치유신에 큰 공을 세운 일본의 거물 사이고 다까모리(西鄕隆盛. 일본의 정치가)는 ‘사람을 상대 말고 하늘을 상대하라. 하늘을 상대하여 힘을 다하고도 스스로 정성이 부족함을 유감으로 여기지 말라’ 고 했는데 과연 명언이다. 오해가 있을 때는 하늘을 상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판단척도와 판단 기준을 가지고 ‘됐다 안됐다. 좋다 나쁘다. 진리다 허위다. 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판단척도와 판단기준이다.
과연 나는 올바른 척도와 기준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편견에 사로잡히고 선입관념에 쌓이고,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편협한 생각과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오해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의 판단기준과 판단척도를 냉정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

나의 얄팍한 경험과 불확실한 지식과 미숙한 사고와 협량한 마음 가지고 남을 오해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말과 같이 남의 눈의 조그만 티끌은 보면서 나의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세태. 한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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