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행복이다.
날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복인이다.
살다 보면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어려운 일이다.
좋은 사람보다는 싫은 사람을 더 만나야하고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추한사람을 더 만나야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욕심 없고 나누기 좋아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은 만나면
그 느낌부터가 틀리다. 그런 사람 옆에 서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
말이 없어도 전해져 온다. 어쩌면 아름다운 심성이나 좋은 느낌들은
언어 이전의 언어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의 외모나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좋고 나쁨을 규정한다. 상당히 계산적인 판단이다.
그것에는 사람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단순히 기계적인 그런 판단은 섣부른 만큼의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 오류 속에는 아름다운 사람과 만날 수 없다는 불행이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때 이야기다. 수달다라는 한 장자가 있었다.
그는 친구를 재산 관리인으로 두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의 재앙이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이 불길하다고 장자에게 그를 해고하라고 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단지 이름은 단지 이름일 뿐
그의 인격은 아니라며 장자는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름이라는 겉을 떠나 인격이라는 속을 보았던 것이다.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알 수 있는 존재다.
겉만을 봐서는 알 수 없는것이 또한 사람이기도 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람은 가까이 하고 마음을 열고 만나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다.
외모가 그럴 듯 하다고 해서 속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눈의 허황됨을 버리고 겸손한 눈으로 봐야만 한다.
조건과 외모만 쫓다가는 정작 중요한 마음과 사람됨을 볼 수 없게 된다.
눈이 겸손하면 사람이 보이고 눈이 교만하면 조건과 외모만이 보일 뿐이다.
눈의 겸손은 지혜에서 온다. 삶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언제나
겉만을 볼 뿐이다. 외모와 조건만을 보는 사람은 안을 볼 수가 없다.
안을 볼 수 없을 때 아름다운 사람 또한 사라져 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를 쪄 밥을 짓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쌀을 쪄 밥을 짓는다.
모래는 아무리 쪄도 밥이 될 수가 없다. 조건과 외모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사람을 만나도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겉을 버리고 안을 보는
겸손한 지혜의 사람만이 진정 변치 않을 자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지금 그대 곁에 자기 자신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가. 없다면 스스로
자신의 안을 보는 지혜가 없음을 한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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