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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는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주치의가 권하는 신장이식 수술에 실패하고 느닷없이 내 아버지가 고인이 되었을 때, 어릴 적 뜻 모르고 외웠던 송강의 시조 한 수를 비로소 깨쳤다. 수술 당일에야 연락을 받았고, 뇌사자의 것이라는 게 꺼림칙해서 늦은 반대를 했지만 친딸의 것을 이식해도 이보다 더 맞을 수 없다는 주치의 말에 그만 머쓱해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5.0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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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국을 끓이다가 잘 불어 색이 짙어지는 미역을 들여다보며 오월이 그냥 갔구나 했네 찬 물에 연록빛 머리칼을 담그면 달콤한 아카시아 향 끝없이 번져 창이 열리고 성큼 문턱을 넘었다네 담장 따라 넝쿨 장미로 피어나면 계절을 휘감고 입 속에서 맴도는 말 그대 길목에 뜨거운 피로 쏟았다네 민들례 홀씨 가서 머무는 자리라면 여기도 오월, 저기도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5.0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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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별미가 되어버린 김치전을 굽다가 엄마의 물 건너온 가방까지 차압딱지가 붙었던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맵고 짜기만 했지 고소함도 바삭함도 혀는 짚어내지 못했다. 여즉 철없는 남동생은 쌀통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만졌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새파란 파를 부지런히 골라냈다 엄마의 김치전은 뒤집으면 부서졌다 부서진 사랑 한 점 놓칠 새라 꼭꼭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4.2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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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 여보, 하고 보니 참말 이상타 나란히 걷는 길 몰라 서로 물을 까닭 없지 입술 꼭 깨물고 눈만 들여다봐도 마음 짐작하는 사인걸 그지 여보, 왜 불러 여보. 당신, 하고 보니 그래도 머쓱해 편지지보단 일기장의 주연인데 당신 따질 것도 더 줄 것도 없이 날마다 콩닥콩닥 시소를 타쟎아 우리, 마주앉은 우리. 자기, 하고 보니 좀은 낫네 간지럽게 속살대던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4.1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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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생김새가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성격이나 취향,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모녀간엔 부딪침이 많았고, 걸핏하면 잔소리를 듣거나 야단맞기 일쑤였다. 내가 결혼식을 올리기 한 달 전부터 엄마는 바지런히 딸 방의 옷장을 비우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록 엄마와 다정하게 지내오지는 않았지만 막상 친정을 떠나 시집을 간다고 생각하니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4.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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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난은 ‘이보라’(소설가)씨가 쓰는 코너입니다. 매주 화요일 오후4시까지 원고를 송고해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에 이보라씨가 바뿐 일정으로 이 주를 거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바삐, 읽을 꺼리를 대체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이해있기 바랍니다. 문득 생각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견해입니다.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재산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강갑준
2007.04.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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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보다 사람이 눈부시단 걸 그때 처음 알았네 열린 내려놓고 싶어...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4.0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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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같은 봄이 생명의 젖을 물었어 엄마, 짙은 현실 슬피 쌓인 안개가슴을 뚫고 몸을 풀어 네게로 사랑을 내려야지 아가, 잠결에도 봄비가 나린다고 새 살이 돋는다고 속살속살 꽃잎에 입맞춤을 하네 봄비로 여린 풀잎 톡 건들면 흐느낄까, 다독이던 손길 거두고 눈길로 대신할래 가랑가랑 춤추며 다가오는 연록빛 방울져 내리는 설레임을 하늘 문 열어 맞이하니, 저기 저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3.27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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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삼월이면 내겐 그리운 대상이 있네 첫사랑을 놓기 위해 꽃샘 추위 속을 헤매, 헤매 다니다가 찾아든 선운사에서 처음 만났네 노랑저고리 다홍치마 화려히 차려 입은 채 발 밑에 무수히 스러졌는데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숨 죽이고 숨소리를 확인했다네 어쩌면 살아서 죽는 이가 다 있네 삶과 죽음이 동일한 처자(處子)가 거기, 있었네 동박새 빨고 간 자리에 입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3.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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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해 거침없이 달리는 몸 비록 고단하다 해도 당신으로 인해 하늘 가득 물오르는 노을보다 붉게 눈이 젖는다 해도 내겐 당신이 있습니다. 문득 당신이 그리울 때 아무는 상처의 딱지를 다시 떼어내어 배어 나오는 핏방울을 들여다볼래요.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조금씩 목숨이 잦아들까요, 걱정 마세요. 비바람 속에 들꽃이 향기를 더하듯 마땅히 나의 삶도 그러할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3.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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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옛 등걸에 봄절(春節)이 돌아온다 옛 피던 가지마다 피염직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바야흐로 꽃을 두고 봄과 겨울이 삼각관계다. 사랑싸움이 한창일 산을 피해 바다를 찾았는데, 지척에 해동용궁사가 있다. 초입의 비문부터 [한 가지 소원은 이룬다] 하니 욕심이 생겨, 바다 속 용궁을 찾듯 수상법당으로 들어선다. 백 팔 돌계단을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금정신문
2007.02.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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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 사는 대학선배가 명절이라고 선물을 보내왔는데, 구룡포 과메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의 토산음식이었던 과메기가 지금은 가까운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일반화 되어버렸지만, 구룡포 과메기는 여전히 명품대접을 받고 있다.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금정신문
2007.02.2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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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아, 내 소중한 딸아기야... 새삼스럽지는 않구나.^^ 밤하늘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마침내 나의 몸 속에 자리잡았음을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얼마나 많은 마음의 편지를 네게로 보냈는지... 셀 수가 없으니까! 그저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건강하기만을 바랬던 처음과는 달리, 네가 세상에 태어난 후부터 엄마는 욕심꾸러기가 되어버렸단다. 한별이
무지개를 완성하는 보라
이보라
2007.02.14 13:58